잉글랜드 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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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의회는 10세기 잉글랜드 통일 이후 국왕이 소집한 전국적인 의회로, 법률 제정, 전쟁과 평화 결정, 국가 재판 역할을 했다. 노르만 정복 이후에는 왕실 법정의 자문과 대평의회 소집을 통해 국왕의 통치를 보좌했다. 1189년에서 1215년 사이에는 재정적 부담 증가로 인해 대평의회에 변화가 생겼고, 존 왕의 통치 시기 대헌장을 통해 국왕의 권한을 제한하고 의회의 역할을 명확히 했다. 13세기에는 '의회'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헨리 3세 시기에는 의회가 정부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13세기 말 에드워드 1세는 모범 의회를 소집하여 대표제를 발전시켰고, 14세기에는 의회가 상원과 하원으로 분리되었다. 15세기 이후 선거권 제한과 튜더 왕조의 왕권 강화, 17세기 스튜어트 왕조의 왕권과 의회 간 갈등을 거쳐 잉글랜드 내전과 명예 혁명을 겪으며 의회의 권한이 확대되었다. 1707년 연합 조약으로 잉글랜드 의회는 해산되고 그 자리에 그레이트브리튼 의회가 설립되었으며, 1801년에는 아일랜드를 통합하여 영국 의회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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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레일리아 의회는 영국 국왕을 국가원수로 하는 양원제 의회로서 법률 제정, 정부 감시, 국가 정책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웨스트민스터 시스템을 기반으로 상원과 하원으로 구성되고 총독이 국왕을 대표한다.
잉글랜드 의회 - [의회]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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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 정보 | |
명칭 | 잉글랜드 의회 |
로마자 표기 | Parliament of England |
개요 | |
유형 | 단원제(circa 1236–1341 / 1649–1657), 양원제(1341–1649 / 1657–1707) |
상원 | 귀족원(1341–1649 / 1660–1707), 크롬웰의 또 다른 의회(1657–1660) |
하원 | 잉글랜드 하원(1341–1707) |
설립 | circa 1236년 |
이전 기관 | 왕의 자문회 |
계승 기관 | 그레이트브리튼 의회 |
해산일 | 1707년 5월 1일 |
의장 | |
대법관 | 제1대 카우퍼 남작 윌리엄 카우퍼¹ |
잉글랜드 하원 의장 | 존 스미스¹ |
선거 정보 | |
귀족원 의원 선출 방식 | 군주에 의한 잉글랜드 귀족 작위 수여 또는 상속 |
하원 의원 선출 방식 | 소선거구제와 제한된 참정권¹ |
구성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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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석 수 (2차 앤 여왕 의회) | 513석 |
의석 구성 | 토리당: 260석 휘그당: 233석 분류되지 않음: 20석 |
회의 장소 | |
장소 | 웨스트민스터 궁전, 웨스트민스터, 미들섹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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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
각주 | ¹ 1707년 당시의 의회 반영 |
관련 의회 | 스코틀랜드 의회, 아일랜드 의회 |
지도 정보 |
2. 역사적 배경
잉글랜드 의회의 기원은 앵글로색슨 시대의 위탄(Witan)과 노르만 정복 이후의 대평의회(magnum conciliumla)로 거슬러 올라간다. 위탄은 국왕이 주요 귀족 및 고위 성직자들과 국가의 중요한 사안을 논의하던 전국적인 자문 기구였다.
1066년 노르만 정복 이후, 잉글랜드 국왕들은 주요 봉신들로 구성된 대평의회(magnum conciliumla)를 소집하여 국가 사업을 논의하고 법률을 공포하는 등 자문을 구했다. 초기 대평의회는 국왕에게 자문을 제공해야 하는 영주들의 봉건적 의무에 기반한 성격이 강했다.
12세기 말에서 13세기 초, 제3차 십자군 원정과 프랑스와의 전쟁 등으로 왕실의 재정적 요구가 커지면서 대평의회의 성격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특히 국가적인 규모의 세금을 부과하기 위해서는 점차 왕국 공동체의 동의를 얻는 것이 중요해졌다.
존 왕의 통치 기간(1199년~1216년) 동안 왕권 남용과 과도한 재정 요구에 대한 귀족들의 불만이 커졌고, 이는 1215년 대헌장(Magna Carta)의 제정으로 이어졌다. 대헌장은 국왕 역시 법의 지배를 받으며, 왕국의 동의 없이는 함부로 세금을 부과할 수 없다는 원칙 등을 명시함으로써 이후 의회 발전에 중요한 법적, 사상적 기초를 마련했다.
2. 1. 앵글로색슨 시대 (10세기 이전)
10세기 영국 통일 이후, 국왕들은 평신도 귀족들과 고위 성직자들을 포함한 전국적인 의회를 소집했다. 앵글로색슨인들은 이러한 의회를 위탄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의회는 국왕이 국가의 먼 지역에 있는 유력자들과 관계를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위탄은 법률 제정과 전쟁과 평화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 역할을 했다. 또한 국가 재판의 장소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1051년 고드윈 백작의 재판이 있었다.2. 2. 노르만 정복 이후 (11세기~13세기)
1066년 노르만 정복 이후, 잉글랜드 국왕은 자신의 curia regis|la (라틴어로 '왕실 법정') 구성원들로부터 정기적인 자문을 받았으며, 때때로 magnum concilium|la (라틴어로 '대평의회')를 소집하여 국가의 중요한 사안을 논의하고 법률을 공포했다. 예를 들어, 도메스데이 북은 1085년 크리스마스에 열린 대평의회에서 기획되었고, 클래런던 헌장은 1164년 의회에서 제정되었다. 대평의회는 토머스 베켓의 재판과 같은 국가적인 재판이 열리는 장소이기도 했다.대평의회는 국왕에게 직접 봉사하는 봉신들, 즉 수장 직할 봉토 소유자들로 구성되었다. 대주교, 주교, 수도원장, 백작, 그리고 남작과 같은 대토지 소유자들은 소환장을 통해 개별적으로 소환되었다. 반면, 소토지 소유자들(주로 한두 개 영지를 소유한 소규모 지주로, 종종 기사로 묘사됨)은 각 주의 보안관을 통해 소환되었다. 이 의회는 오늘날의 대표적인 또는 민주적인 의회와는 거리가 멀었다. 영주들이 군주인 국왕에게 자문을 제공해야 하는 봉건적 의무를 이행하는 자리였던 것이다. 국왕은 대평의회를 통해 주요 신하들과 상담할 수 있었지만, 이러한 상담이 왕실 정책의 실질적인 변화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역사가 주디스 그린에 따르면, "이러한 의회는 토론보다는 (왕의 결정을) 비준하고 공표하는 데 더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대평의회는 국왕이 원할 때마다 겔드(1162년 폐지)와 같은 세금을 부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조세 승인에 관해서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1189년부터 1215년 사이는 대평의회에 중요한 전환기였다. 이러한 변화는 왕실이 제3차 십자군 원정, 리처드 1세의 몸값 지불, 그리고 플랜태지넷 왕조와 카페 왕조 사이의 앵글로-프랑스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새로운 재정적 부담을 지우면서 시작되었다. 1188년, 대평의회가 헨리 2세에게 살라딘 십일조 부과를 승인한 것이 중요한 선례가 되었다. 이 세금을 승인함으로써 대평의회는 모든 납세자를 대표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국가적인 규모의 세금 부과에 대한 저항 가능성이 커지면서, 국왕에게는 세금 부과에 대한 동의를 얻는 것이 정치적으로 중요해졌다. 국왕은 대평의회를 왕국 전체를 대표하여 동의할 수 있는 기구로 내세우는 것이 편리했다. 이 시기 왕국은 점차 communitas regni|la (라틴어로 '왕국의 공동체')로 묘사되었고, 귀족들은 이 공동체의 자연스러운 대표자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귀족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옹호하려 하면서 국왕과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존 왕 (재위 1199년~1216년)은 사법 절차의 불공정성, 과도한 재정 요구, 그리고 봉건적 상속세나 원조금 징수 권한 남용 등으로 귀족들의 불만을 샀다. 결국 1215년, 귀족들은 존 왕에게 이전 국왕들이 발표했던 자유 헌장과 유사한 자유 헌장을 승인하도록 강요했다. 대헌장(Magna Carta, 라틴어로 '대헌장')으로 알려진 이 문서는 이후 의회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세 가지 기본 원칙을 담고 있었다.
1. 국왕은 법의 지배를 받는다.
2. 국왕은 왕국 공동체의 동의 없이는 (관습적인 봉건적 세금을 제외하고) 법을 제정하거나 세금을 부과할 수 없다.
3. 신하들이 국왕에게 바치는 충성은 조건부이며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특히 제12조는 특정 세금은 "우리 왕국의 공동 의회(commune consilium regni nostri|la)를 통해서만" 부과될 수 있다고 명시했고, 제14조는 이 공동 의회가 주교, 백작, 그리고 주요 남작들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규정했다.[1] "공동 의회 없이는 과세 없다"는 원칙을 담은 이 조항은 이후 개정판에서는 삭제되었지만, 그 정신은 후대 국왕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대헌장은 존 왕의 통치 이후 잉글랜드의 기본법과 같은 지위를 얻게 되었다.
1230년대 이후, 의회는 점차 웨스트민스터에서 정기적으로 열리게 되었다. 회의는 주로 법정이 개정되는 시기, 즉 1월이나 2월(힐러리 학기), 4월이나 5월(이스터 학기), 7월, 그리고 10월(마이클머스 학기)에 맞춰 소집되는 경향을 보였다.
대부분의 의회에는 40명에서 80명 정도가 참석했다. 의회 회의에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인물들이 참석했다.
- 국왕
- 재상 및 기타 주요 각료 (국무대신, 국왕좌부법원 판사, 민사소송법원 판사, 재무부 장관)
- 국왕의 평의회 구성원
- 고위 성직자 (대주교, 주교, 수도원장, 수도원장)
- 고위 귀족 (백작과 남작)
하급 성직자들(대성당 주임 사제, 대성당 수도원장, 대부제, 교구 사제)은 교황령에 따른 과세 문제가 논의될 때만 간혹 소환되었다. 1220년대부터 로마법의 격언인 quod omnes tangit ab omnibus approbetur|la (라틴어로 '모든 이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모든 이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대표성 개념에 새로운 중요성을 부여했다. 성직자들은 교회 회의나 의회에서 자신들을 대표할 대리인을 선출하기 시작했다.
봉건제가 약화되고 젠트리와 상인 계층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각 주와 자치 도시들은 통합된 선거구를 가진 공동체(communitas|la)로 인정받기 시작했고, 기사와 시민들이 이들을 대표할 수 있게 되었다. 초기에는 새로운 세금이 제안될 때만 기사와 시민들이 소환되었다. 이는 공동체(훗날의 하원)의 대표들이 세금이 정당하게 부과되었음을 지역 사회에 보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소위 1295년의 모범 의회 이전, 즉 1290년대까지는 하원 대표들이 정기적으로 소집되지는 않았다. 실제로 1274년부터 1294년까지 열린 30번의 의회 중 기사들은 4번, 시민들은 2번만 참석했을 뿐이다.
초기 의회는 점차 유럽 대륙의 삼부회와 유사하게 사회의 주요 계층들, 즉 지주 귀족(남작과 기사), 성직자, 그리고 도시 대표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형태를 갖추어 갔다. 역사가 존 매디콧은 "의회 내 주요 구분선은 귀족과 평민 사이라기보다는, 지주 계급과 그 외 모든 이들(하급 성직자와 시민) 사이에 있었다"고 지적한다.
전문가들도 전문적인 조언을 제공하기 위해 의회에 소환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1291년 노럼(Norham) 의회에는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초기 왕위 계승 분쟁에 대한 자문을 구하기 위해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의 로마법 전문가들이 소환되었다. 또한 1296년 베리 세인트 에드먼즈 의회에서는 잉글랜드군에 의해 함락된 베릭어폰트위드 재건에 대한 자문을 위해 "새로운 도시를 계획하고 건설하는 방법을 가장 잘 아는" 시민들이 소환되기도 했다.
의회는 점차 '고등 의회 법정'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잉글랜드 최고의 사법 기관 역할을 수행했다. 의회 업무의 상당 부분은 장관, 판사, 기타 정부 관리들이 제기한 사법적 문제들을 다루는 것이었다. 또한 일반적인 행정이나 사법 절차를 통해 불만이 해결되지 않은 개인들이 제출한 수많은 청원을 처리했다. 청원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점차 특정 부서(대법원, 재무부, 법원 등)로 분담되었고, 국왕의 의회는 가장 중요한 사안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의회는 "청원을 접수하고 분류하는 장소"가 되었다. 1290년부터 1307년까지 길버트 오브 로스버리(Gilbert of Rothbury)가 의회 업무 및 기록 보관을 담당했는데, 이는 사실상 의회 서기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었다.
국왕은 의회 밖에서도 칙허장이나 밀봉 칙서 형태로 행정 명령(acta|la)을 내리거나, 특정 사건에 대한 대응으로 대법원을 통해 영장을 발부하는 방식으로 법률을 제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왕은 의회를 통해 법률을 공포하기도 했다. 의회의 입법적 역할은 대체로 수동적이었으며, 실제 법 제정 작업은 국왕과 그의 의회, 특히 법령 초안을 작성하는 판사들이 주도했다. 완성된 법률은 비준을 위해 의회에 제출되었다.
국왕은 특히 군사 작전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의회의 협조가 필요했다. 대헌장을 근거로 의회는 점차 조세 동의권을 주장하게 되었고, 국왕이 세금을 부과하는 대가로 의회에 양보(예: 대헌장의 자유 재확인)를 하는 패턴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세금 부과를 거부하는 것은 국왕과의 갈등 상황에서 의회가 사용할 수 있는 주요한 수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왕은 의회의 동의 없이도 다음과 같은 출처에서 일정량의 수입을 확보할 수 있었다.
- 주(County) 세금 보증: 보안관이 왕실 토지를 관리하고 수익을 얻는 대가로 매년 고정 금액 납부
- 순회 재판소에서 얻는 이익
- 왕실 직할령, 도시, 외국 상인, 그리고 특히 잉글랜드 유대인에 대한 징세
- 군역 면제금
- 봉건적 의무 불이행에 따른 벌금
- 후견권, 재산 몰수, 공석인 주교구에서 얻는 이익
3. 의회 제도의 발전 (13세기~14세기)
(내용 없음 - 하위 섹션에서 상세 내용을 다루므로 중복 방지를 위해 본 섹션 내용은 생략함)
3. 1. '의회'(Parliament) 용어의 등장과 초기 의회
'의회'(Parliament)라는 용어는 11세기 후반 프랑스어 parlement|파를르망프랑스어에서 유래했으며, 이는 '협상' 또는 '대화'를 의미한다. 1230년대 중반부터 이 용어는 대평의회 회의를 지칭하는 일반적인 명칭이 되었고, 이러한 의미로 처음 사용된 기록은 1236년에 나타난다.13세기에는 북서 유럽 전역에서 의회 제도가 발전하고 있었다. 당시 잉글랜드 국왕들은 프랑스 국왕의 봉신으로서 파리 고등법원에 청원을 제기하기도 했다. 13세기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의회는 기능적으로 유사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두 제도는 중요한 차이를 보이며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초기 잉글랜드 의회는 '고등 의회 법정'으로 불리며 잉글랜드 최고의 사법 기관 역할을 수행했다. 의회의 주요 업무 중 하나는 장관, 판사 등 정부 관리들이 제기한 사법적 문제를 다루는 것이었다. 또한, 일반적인 행정이나 사법 절차로 불만을 해결하지 못한 개인들이 의회에 청원을 제출하는 경우가 많았다. 청원의 수가 증가하자, 점차 특정 부서(대법원, 재무부 등)로 청원이 분배되었고, 국왕의 의회는 더 중요한 사안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의회는 "청원을 접수하고 분류하는 장소"로서의 기능을 확립했다. 1290년부터 1307년까지 길버트 오브 로스버리(Gilbert of Rothbury)가 의회 업무 및 기록 보관을 담당하며 사실상 의회 서기관의 역할을 수행했다.
국왕은 의회 밖에서도 법률 제정 권한을 가졌다. 국왕의 의회가 국왕 특허장이나 밀서 형태로 작성한 행정 명령인 acta|악타la나 특정 법원 사건에 대한 대응으로 대법원이 작성한 영장을 통해 법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국왕은 의회를 통해 법률을 공포하기도 했다. 의회의 입법적 역할은 주로 수동적인 편이었으며, 실제 법 제정 작업은 국왕과 그의 의회, 특히 법령 초안을 작성하는 의회 내 판사들이 주도했다. 완성된 법률은 비준을 위해 의회에 제출되었다.
국왕이 군사 작전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의회의 동의가 필수적이었다. 대헌장에 근거하여 의회는 과세 동의권을 주장했고, 국왕이 세금을 부과하는 대가로 의회의 요구(예: 대헌장의 자유 재확인)를 수용하는 패턴이 점차 자리 잡았다. 과세 거부는 국왕과의 갈등 상황에서 의회가 사용할 수 있는 주요한 압박 수단이었다. 그럼에도 국왕은 의회의 동의 없이도 일정 부분 수입을 확보할 수 있었는데, 그 예시는 다음과 같다.
수입원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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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세금 농장 | 보안관이 자치구 내 왕실 토지를 관리하고 수익을 얻는 대가로 매년 고정 금액을 납부 |
순회 재판 수익 | 순회 재판 과정에서 발생하는 벌금 등 |
왕실 직할지 과세 | 왕실 직할지, 도시, 외국 상인, 특히 잉글랜드 유대인에 대한 과세 |
군역세 | 봉신들이 군 복무 대신 납부하는 세금 |
봉건적 의무 및 벌금 | 봉건 제도 하에서의 각종 의무 이행 요구 및 벌금 |
수호권, 몰수, 공석 주교좌 수익 | 미성년 상속인의 후견 권리, 상속인 없는 영지의 몰수, 주교가 공석일 때 발생하는 수익 |
헨리 3세(재위 1216~1272)는 아버지 존 왕이 제1차 남작 전쟁 중 사망하면서 아홉 살에 왕위에 올랐다. 그의 미성년 통치 기간 동안 잉글랜드는 섭정 정부에 의해 다스려졌는데, 섭정들은 자신들의 통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대평의회에 크게 의존했다. 심지어 일반적으로 왕실 특권으로 여겨지는 왕실 장관 임명에도 대평의회의 동의를 구했다. 역사가 존 매디콧은 이러한 미성년 통치기의 영향으로 대평의회가 국가 운영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자리 잡았으며, 이전에는 갖지 못했던 독자적인 주도권과 권위를 확보하게 되었다고 평가한다.
헨리 3세가 16세가 된 1223년, 섭정 통치가 공식적으로 종료되자 귀족들은 왕에게 1216년과 1217년에 승인된 대헌장의 내용을 재확인하여 성년 왕으로서의 통치 합법성을 보장할 것을 요구했다. 동시에 왕은 프랑스의 침략으로부터 푸아투와 가스코뉴 영지를 방어하기 위한 자금이 필요했다. 1225년 대평의회에서는 왕이 대헌장과 숲의 헌장을 재발급하는 대가로 동산 가치의 15분의 1에 해당하는 세금을 부과하는 데 합의했다. 이는 세금 부과와 불만 해소가 연계되는 중요한 선례를 남겼다.
1232년, 피터 드 로슈(Peter des Roches)가 왕의 수상이 되었다. 그의 조카 피터 드 리보(Peter de Rivaux)는 비밀 인장 보관관, 의류 관리 등 여러 관직을 독점했는데, 이러한 임명은 섭정 시대의 관행과 달리 귀족들의 승인을 거치지 않았다. 로슈의 집권 하에서 정부는 존 왕 시대에 사용되었고 대헌장에서 비판받았던 관행들, 예를 들어 임의적인 무단 점유, 왕실 칙령으로 부여된 권리의 폐지, 상속권 박탈, 외국인과의 결혼 강요 등을 부활시켰다.
로슈와 리보 모두 푸아투 출신 외국인이었다. 외국인이 장악하고 오직 왕에게만 충성하는 행정부의 등장은 권력에서 소외된다고 느낀 토착 귀족들의 불만을 샀다. 일부 남작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주교들이 중재에 나서 왕에게 장관 교체를 설득했다. 1234년 4월의 대평의회에서 왕은 결국 리보와 다른 장관들을 해임하는 데 동의했다. 이는 왕이 대평의회, 즉 의회의 압력으로 장관을 교체하도록 강요받은 최초의 사례였으며, 이후 장관 임명 문제를 둘러싼 왕과 의회의 갈등은 영국 정치의 지속적인 특징이 되었다.
이후 헨리 3세는 의회와 협력하며 통치하는 모습을 보였다. 의회는 외교 정책, 과세, 사법, 행정, 입법 등 다양한 문제를 심의했다. 1236년 1월에는 최초의 영국 법령으로 평가받는 머튼 법령(Statute of Merton)이 통과되었다. 이 법은 여러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특히 서자의 상속 금지 조항을 유지했다. 주목할 점은 법령 서문에 입법 과정이 귀족들이 "제공하고" 왕이 "허용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것인데, 이는 단순히 왕이 결정하고 남작들이 동의한 것이 아니라, 남작들의 주도적인 역할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1237년, 헨리 3세는 여동생 잉글랜드의 이사벨라(Isabella of England)의 결혼 지참금을 마련하기 위해 의회에 세금을 요청했다. 남작들은 처음에는 미온적이었으나, 왕이 대헌장 재확인, 개인 평의회에 귀족 3명 추가, 왕실의 징발권 제한, 토지 소유권 보호 등을 약속하자 자금 지원에 동의했다.
하지만 헨리 3세는 가족 및 상속 문제, 후원, 관직 임명 등은 오롯이 자신의 왕실 특권에 속하는 문제라고 강경하게 주장했다. 1254년 막내아들 에드먼드 크라우치백(Edmund Crouchback)에게 시칠리아 왕국의 왕위를 계승시키기로 한 결정과 같은 중요한 사안들이 의회와의 상의 없이 이루어졌다. 그는 또한 대법관, 사법관, 재무장관이라는 세 핵심 관직의 임명 문제를 놓고 의회와 충돌했다. 남작들은 이들 관직이 왕실의 잘못된 통치를 견제해야 한다고 믿었지만, 왕은 자신에게만 충성하는 왕실 가신 그룹 내 하급 관리들을 이 자리에 임명하려 했다.
1253년, 가스코뉴에서의 전투 중 헨리 3세는 카스티야의 알폰소 10세(Alfonso X of Castile)의 예상되는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병력과 자금을 요청했다. 1254년 1월 의회에서 주교들은 자체적으로 원조를 약속했지만, 나머지 성직자들은 동참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남작들은 왕이 공격받을 경우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지만, 평민들의 재정 지원까지 약속하지는 않았다. 이에 따라 각 교구의 하급 성직자들은 교회 종교회의에서 대표를 선출했고, 각 주에서는 두 명의 셔어 기사를 선출했다. 이 대표들은 1254년 4월 의회에 소환되어 과세에 대한 동의를 표명했다. 셔어 기사로 선출된 이들은 지방 행정 경험이 있고 군 복무 경력도 갖춘 유력한 토지 소유자들이었다. 이들은 해당 주의 남작, 다른 기사들, 그리고 충분한 재산을 가진 자유 소유권자들에 의해 선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의회 구성에 지역 대표성이 점차 반영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변화였다.
3. 2. 대표제의 발전과 모범 의회 (1295년)
헨리 3세의 통치 기간, 특히 섭정 정부 시기에는 대평의회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1225년에는 대헌장과 숲의 헌장을 재발급하는 대가로 세금을 부과하는 데 합의하면서, 세금 부과와 불만 해소가 연계되는 중요한 선례가 만들어졌다.[1][2] 이후 왕과 의회는 장관 임명, 법령 제정(머튼 법령, 1236년) 등 다양한 사안에서 협력하기도 했으나, 왕실 특권에 속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갈등이 지속되었다.대표제가 발전하는 중요한 계기는 1254년에 마련되었다. 헨리 3세가 가스코뉴에서의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의회를 소집했을 때, 주교와 귀족들은 자신들의 지원만 약속할 뿐, 나머지 성직자와 평민들의 동의까지 보장하지는 못했다. 이에 따라 각 교구의 하급 성직자 대표와 각 카운티에서 선출된 두 명의 기사가 1254년 4월 의회에 소집되어 과세에 대한 동의를 구하게 되었다. 이는 왕이 과세 동의를 얻기 위해 지역 대표를 의회에 소집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초기 사례이다. 이 시기 선출된 기사들은 지방 행정과 군사 경험이 있는 유력자들이었다.
헨리 3세와 귀족 간의 갈등은 시칠리아 문제로 인해 1258년 옥스퍼드 의회에서 옥스퍼드 조항 채택으로 이어졌다. 이 조항은 왕이 선출된 귀족 평의회의 조언에 따라 통치하고, 의회를 정기적으로(연 3회) 소집하도록 규정하여 의회의 권한을 강화했다. 이후 웨스트민스터 조항(1259년) 등을 통해 개혁이 이루어졌으나, 헨리 3세는 결국 교황의 도움을 받아 옥스퍼드 조항을 폐기하고 권력을 회복하려 시도했으며, 이는 제2차 남작 전쟁으로 이어졌다.
에드워드 1세 시대에 대표제는 더욱 발전했다. 1294년 프랑스와의 가스콘 전쟁, 웨일스 반란,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등으로 막대한 전쟁 비용이 필요해지자, 에드워드 1세는 의회의 승인 없이 상인의 양모를 압수하거나 교회 재산을 징발하는 등 자의적인 조치를 취했다.
이러한 재정적 압박 속에서 광범위한 동의를 통한 자금 확보의 필요성이 커졌고, 이는 1295년 11월 모범 의회(Model Parliament) 소집으로 이어졌다. 이 의회에는 개별적으로 소환된 귀족과 고위 성직자들 외에도, 각 주에서 선출된 기사 2명과 각 자치시에서 선출된 시민 대표 2명이 참석했다. 이전에도 평민 대표들이 의회에 소집된 적은 있었지만, 주로 귀족들이 결정한 사항에 동의하는 역할에 머물렀다. 그러나 모범 의회에서는 소환장에 명시된 대로 기사와 시민 대표들에게 세금 부과뿐만 아니라 국정 현안에 대해 조언하고 동의할 권한(plenam et sufficientem potestatem|플레남 에트 수피키엔템 포테스타템lat)이 공식적으로 부여되었다. 이는 잉글랜드 의회 역사에서 평민 대표의 역할이 격상되고 대표제의 원칙이 확립되는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3. 3. 상원과 하원의 분리
헨리 3세(재위 1216년~1272년)는 아버지인 존 왕이 제1차 남작 전쟁 중 사망한 후 아홉 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헨리 3세가 어렸을 때는 섭정 정부가 잉글랜드를 통치했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대평의회에 크게 의존했다. 대평의회는 심지어 일반적으로 왕실 특권으로 여겨지는 왕실 장관 임명에도 동의했다. 역사가 존 매디콧은 "미성년 시대의 영향으로 대평의회는 국가 정부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고, 중앙 집권적인 의회가 이전에는 결코 가지지 못했던 독립적인 주도권과 권위를 갖게 되었다"고 평가했다.1223년 헨리 3세가 16세가 되면서 섭정 정부는 공식적으로 끝났고, 귀족들은 성인이 된 왕에게 1216년과 1217년에 승인했던 마그나 카르타를 다시 확인하여 통치의 합법성을 보장해 줄 것을 요구했다. 동시에 왕은 프랑스의 침략으로부터 푸아투와 가스코뉴 영지를 지키기 위한 자금이 필요했다. 1225년 대평의회에서는 마그나 카르타와 숲의 헌장을 재발급하는 대가로, 동산 가치의 15분의 1(7%)에 해당하는 세금을 부과하는 데 합의했다. 이는 세금 부과가 백성들의 불만을 해소하는 것과 연계될 수 있다는 중요한 선례를 남겼다.
이후 왕당파 귀족과 반란파 귀족들은 제2차 남작 전쟁에서 맞붙었다. 시몽 드 몽포르는 1264년 루이스 전투에서 왕을 물리치고 이후 12개월 동안 잉글랜드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몽포르는 1264년 6월, 새로운 형태의 정부를 승인하고 지지 세력을 모으기 위해 의회를 소집했다. 이 의회는 단순히 세금 문제에 동의하는 것을 넘어, 정치 문제에 대해 충분히 논의할 것으로 기대되는 대표 기사들을 포함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6월 의회는 왕의 권한을 9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평의회에 넘기는 새로운 헌법을 승인했다. 이 평의회는 세 명의 선거인(몽포르, 칠체스터 주교 스티븐 버스테드,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에 의해 선출되고 이끌어졌다. 선거인들은 필요에 따라 9명의 평의회 의원 중 누구든 교체할 수 있었지만, 선거인 자신들은 오직 의회에 의해서만 해임될 수 있었다.
몽포르는 집권 기간 동안 두 차례 더 의회를 소집했다. 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시몽 드 몽포르 의회로, 프랑스의 침략 위협과 왕국 내 불안 속에서 1265년 1월에 소집되었다. 이 의회에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자치시민(burgesses, 즉 고대 자치구나 도시의 부유한 상인이나 장인 중에서 선출된 대표)들이 대표 기사들과 함께 소환되었다. 이는 훗날 하원을 구성하게 될 평민 대표가 의회에 참여하는 중요한 시작점으로 평가받는다.
몽포르는 1265년 이브셤 전투에서 사망했고, 헨리 3세는 권력을 되찾았다. 1266년 8월 의회는 몽포르가 시행했던 모든 조치를 무효화하고 왕에 대한 모든 제약을 없앤 케닐워스의 결정을 승인했다. 그러나 1267년에는 1259년 웨스트민스터 조항에 포함되었던 일부 개혁 내용이 말버러 법령 형태로 다시 법제화되었다. 이는 헨리 3세의 후계자 통치 기간까지 이어진 법률 개혁 과정의 시작이었다.
3. 4. 의회 권한의 확대
헨리 3세 (재위 1216년~1272년)는 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그의 아버지 존 왕은 제1차 바론 전쟁 중에 사망했다. 헨리 3세가 미성년자였던 시기에는 섭정 정부가 잉글랜드를 통치했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통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대평의회에 크게 의존했다. 심지어 대평의회는 일반적으로 왕실 특권으로 여겨지는 왕실 장관 임명에도 동의했다. 역사가 존 매디콧은 이에 대해 "미성년 시대의 영향으로 대평의회는 국가 정부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고, 중앙 집권적인 의회가 이전에 결코 가지지 못했던 독립적인 주도권과 권위를 갖게 되었다"고 평가했다.1223년 헨리 3세가 16세가 되어 섭정 정부가 공식적으로 끝나자, 귀족들은 성년이 된 왕에게 1216년과 1217년에 승인되었던 대헌장의 내용을 다시 확인하여 그 합법성을 보장해 줄 것을 요구했다. 동시에 왕은 프랑스의 침략으로부터 푸아투와 가스코뉴 영지를 지키기 위한 자금이 필요했다. 1225년 열린 대평의회에서는 대헌장과 숲의 헌장을 재발급하는 대가로, 동산 가치의 15분의 1(7%)에 해당하는 세금을 부과하는 데 합의했다. 이는 세금 부과가 백성들의 불만을 해소하는 것과 맞바꾸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중요한 선례를 남겼다.
에드워드 1세 (재위 1272년~1307년)는 아버지 헨리 3세 통치의 실패를 보며, 합의를 형성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의회가 유용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의회는 일반적으로 봄의 부활절과 가을의 미카엘절 이후, 매년 두 차례 정기적으로 소집되었다.
에드워드 1세 시대에는 관습법을 개정하는 주요 법령들이 의회에서 처음으로 공포되었다.
- 웨스트민스터 칙령 제1조 (1275년)
- 글로스터 칙령 (1278년)
- 사유재산 불가칙령 (1279년)
- 웨스트민스터 칙령 제2조 (1285년)
- 윈체스터 칙령 (1285년)
- 퀴아 엠프토레스 칙령 (1290년)
- 쿠오 워런토 칙령 (1290년)
이 중 첫 번째 웨스트민스터 칙령은 외부의 위협 없이 자유로운 선거가 치러질 것을 요구했다. 이 법은 당시 영국의 주요 산업이었던 양모 무역에 대한 세금 부과와 함께 시행되었는데, 수출되는 양모 자루당 반 마르크(6실링 8페니)를 부과하는 내용이었다. 이는 magna et antiqua custuma|마그나 에트 안티콰 쿠스투마la(라틴어: '크고 오래된 관세')로 알려졌으며, 에드워드 1세와 그의 후계자들에게 부여되어 17세기까지 왕실의 영구적인 수입원 중 하나가 되었다.
4. 15세기~17세기 의회의 변화와 위기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 잉글랜드 의회는 중대한 변화와 격동의 시기를 겪었다. 15세기에는 주 의원 선출을 위한 선거권이 재산 기준으로 제한되면서 40실링 자유 소유주만이 투표권을 갖게 되는 등 변화가 있었다.
16세기 튜더 왕조 시대에는 헨리 8세나 엘리자베스 1세와 같은 강력한 군주들이 통치했지만, 세금 부과나 잉글랜드 종교 개혁과 같은 중요한 정책을 추진하고 그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의회의 승인이 필수적이었다. 이 시기에 상원과 하원으로 구성된 의회의 기본적인 구조가 자리를 잡았다.
17세기 스튜어트 왕조 시대에는 왕권과 의회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다.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는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며 의회와 충돌했고, 이는 권리 청원(1628년) 제출로 이어졌다. 찰스 1세의 의회 무시와 전제 정치 시도는 결국 잉글랜드 내전(1642년~1651년)을 촉발했다. 내전은 의회파의 승리와 찰스 1세 처형(1649년)으로 끝났고, 잠시 잉글랜드 공화국이 수립되기도 했다. 왕정복고(1660년) 이후에도 찰스 2세, 제임스 2세와 의회 간의 긴장은 계속되었다. 특히 가톨릭 신자였던 제임스 2세의 통치는 명예혁명(1688년)으로 이어졌고, 혁명의 결과로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가 공동 왕위에 오르면서 의회는 권리장전(1689년)을 제정하여 의회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고 왕권을 제한했다. 이로써 영국 입헌군주제의 토대가 마련되었고, 국가 통치에서 의회의 우위가 확립되는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했다.
4. 1. 15세기: 선거권 제한과 귀족 세력의 강화
이 시기에는 하원 의원 선거에 투표할 수 있는 사람의 수를 제한하는 선거권 제도가 도입되었다. 1430년부터 주 의원을 선출하는 주 선거구의 선거권은 연 수입 40실링(2파운드) 이상의 자유 소유지를 가진 남성, 즉 40실링 자유 소유주에게만 주어졌다. 잉글랜드 의회는 헨리 6세 재위기인 1430년(8 헨리 6세 법률 제7조)에 이러한 통일된 주 선거권에 대한 법률을 제정했다. 이 법률은 1432년 1432년 주 의원 선거인 법률(10 헨리 6세 법률 제2조)에서 수정 및 재확인되었는데, 해당 주에 40실링 가치의 자유 소유지를 가진 거주민만이 투표할 수 있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4. 2. 튜더 시대 (16세기): 왕권 강화와 의회

튜더 왕조(House of Tudor) 시대에 영국 의회의 현대적인 구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평가가 있다. 역사학자 J. E. 니일(J. E. Neale)에 따르면 튜더 군주들은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으며, 몇 년 동안 의회를 전혀 소집하지 않기도 했다. 그러나 튜더 군주들은 백성들의 불만을 사지 않고 합법적으로 세금을 걷고 여러 결정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의회의 승인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군주가 필요할 때 의회를 소집하고 해산하는 관행이 자리 잡게 되었다. 특히 종교 개혁을 추진하고 이에 대한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 의회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종교 문제는 전통적으로 왕실의 고유 권한이었지만, 주교와 하원의 동의가 필수적이었다.
헨리 7세가 1485년 왕위에 올랐을 때, 군주는 상원이나 하원의 구성원이 아니었다. 따라서 군주는 의회 내 지지자들을 통해 자신의 의사를 전달해야 했다. 의회 운영 절차는 각 원의 의장이 관리했다.
1540년대부터 하원의 의장은 공식적으로 '스피커'(Speaker)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이전에는 '발언자'(prolocutor) 또는 '의장'(parlour)으로 불렸다. 이 직책은 1258년 옥스퍼드 의회에서 피터 드 몽포르(Peter de Montfort)가 의장 역할을 한 이후 존재해 온 것으로, 종종 군주가 임명하는 준공식적인 자리였다. 의장직은 결코 쉬운 자리가 아니었다. 하원이 불만을 가질 경우, 그 내용을 군주에게 직접 전달해야 하는 책임이 의장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새로 선출된 하원 의장이 다른 의원들에게 의장석으로 끌려가는 전통이 생겨났다.
양원의 구성원은 누구나 법안을 의회에 제출할 수 있었다. 군주가 지지하는 법안은 주로 의회에 참석한 추밀원 구성원들이 제안했다. 법안이 법률로 제정되려면 양원의 과반수 찬성을 얻은 후 군주에게 제출되어 왕실 재가 또는 거부권 행사를 거쳐야 했다. 왕실 거부권은 16세기와 17세기에 여러 차례 행사되었으며, 이론적으로 영국 군주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법률 거부권을 가지고 있지만 1707년 이후로는 행사된 적이 없다. 만약 오늘날 거부권이 행사된다면 심각한 헌법적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
법안이 제정되는 과정은 왕국의 각 계층, 즉 국왕, 귀족, 그리고 하원의 동의를 얻는 절차였다. 이 시대의 영국 의회는 민주적으로 국민을 대표하는 기관과는 거리가 멀었다. 상원은 왕국의 모든 귀족과 고위 성직자들로 구성되었다.
하원의 선거권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일부 역사가들은 성인 남성 인구의 3% 정도만이 투표권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하며, 비밀 투표는 시행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많은 지역구에서 선거는 지역 유력자들에 의해 좌우될 수 있었다. 유권자 대다수가 특정 유력자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거나, 금전 또는 다른 대가로 매수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 유력자들이 현직 군주를 지지한다면, 군주와 그 각료들은 의회 운영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의회에 선출된 많은 의원들은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대변해야 한다는 사실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원 의원이 왕실로부터 관직을 얻지 않는 한 사임하는 것을 불법으로 규정하는 법률이 제정되었고, 이 법은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다. (현대에 와서는 이 규정 때문에 사실상 사임을 허용하는 법적 허구가 만들어졌지만, 여전히 사임에는 왕실의 허가가 필요하다.) 비록 이 시대의 여러 의회 선거가 현대적 기준으로 볼 때 부패했다고 여겨질 수 있지만, 비밀 투표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선거에서는 후보들 간의 실질적인 경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4. 3. 스튜어트 시대 (17세기): 왕권과 의회의 갈등

튜더 왕조 시대에도 의회가 항상 왕의 뜻에 순응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17세기 스튜어트 왕조가 들어서면서 의회의 왕권 비판은 더욱 거세졌다.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제임스 1세로 즉위하며 스튜어트 왕조가 시작되었다.
1628년, 찰스 1세의 자의적인 통치에 반발한 하원은 권리 청원(Petition of Right)을 제출하여 국민의 자유를 보장할 것을 요구했다. 찰스 1세는 이를 수락했으나, 곧 의회를 해산하고 11년 동안 의회 없이 통치하는 독재를 강행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와의 주교 전쟁(Bishops' Wars)(1639~1640)으로 재정적 어려움에 처하자, 새로운 세금을 걷기 위해 다시 의회를 소집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잠시 소집되었다가 해산된 단기 의회(Short Parliament)(1640년)와 이후 1660년까지 여러 차례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며 존속한 장기 의회(Long Parliament)가 소집되었다.
장기 의회에서는 국왕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더욱 커졌으며, 존 핌(John Pym)과 같은 인물들이 하원에서 비판을 주도했다. 국왕과 의회 사이의 긴장은 1642년 1월, 찰스 1세가 직접 하원에 군대를 이끌고 들어가 핌을 포함한 다섯 명의 의원(Five Members)을 반역죄로 체포하려다 실패하면서 극에 달했다. 다섯 명의 의원은 미리 피신했고, 의장 윌리엄 렌솔(William Lenthall)은 국왕의 질문에 "여기서는 폐하의 충성스러운 신하로서 보고 들을 눈과 말할 혀만 가지고 있을 뿐"이라며 의원들의 소재를 밝히기를 거부하여 국왕은 더욱 굴욕을 당했다.
이 사건 이후 국왕과 의회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되었다. 아일랜드에서 가톨릭 봉기가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양측 모두 군대를 모집했지만, 곧 이 군대는 서로를 향하게 되었다. 1642년 10월 엣지힐 전투(Battle of Edgehill)를 시작으로 잉글랜드 내전(English Civil War)이 발발했다. 의회를 지지하는 세력은 의회파(또는 라운드헤드(Roundheads))로, 국왕을 지지하는 세력은 왕당파(또는 캐벌리어(Cavalier))로 불렸다.
내전은 의회파의 승리로 끝났고, 이는 1649년 1월 찰스 1세의 처형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으로 이어졌다. 처형에 앞서 1648년 12월, 의회파 군대인 신모델군(New Model Army)은 프라이드의 정화(Pride's Purge)를 통해 군대의 입장에 반대하는 의원들을 축출했다. 이렇게 남은 의회는 잔존 의회(Rump Parliament)라 불렸으며, 국왕을 반역죄로 재판에 회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국왕 처형 후 상원은 폐지되었고, 정화된 하원이 잉글랜드를 통치하며 11년간의 공화정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잔존 의회는 1653년 4월, 종교 정책과 선거 방식 등을 둘러싼 내부 갈등 끝에 군부의 실권자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에 의해 해산되었다. 크롬웰은 이후 베어본 의회(Barebone's Parliament)(1653년), 제1 보호령 의회(First Protectorate Parliament)(1654~1655년), 제2 보호령 의회(Second Protectorate Parliament)(1656~1658년) 등을 소집했으나,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해산하는 일을 반복했다. 크롬웰은 국가 원수인 호국경(Lord Protector)으로 통치했으며, 제2 보호령 의회로부터 왕위를 제안받았으나 거절했다. 하지만 그가 승인한 겸손한 청원과 조언(Humble Petition and Advice)은 선출된 하원과 귀족들로 구성된 상원, 그리고 의회와 법률에 종속되는 군주(또는 호국경)라는 정부 구조를 제시하며 이후 의회 제도의 기초를 마련했다. 1657년에는 스코틀랜드 의회(Parliament of Scotland)를 일시적으로 잉글랜드 의회에 통합시키기도 했다. 공화정 시대, 특히 잔존 의회의 존재는 군주와 상원 없이도 의회가 국가를 통치할 수 있음을 보여준 중요한 선례를 남겼다.
1658년 9월 올리버 크롬웰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리처드 크롬웰이 호국경 자리를 계승했지만, 군부의 압력으로 곧 실각했다. 이후 군부 내 권력 다툼과 혼란이 이어지다가 스코틀랜드 주둔군 사령관이었던 조지 몽크 장군이 런던으로 진격하여 상황을 장악했다. 몽크는 프라이드의 정화 이전의 장기 의회 의원들을 복귀시켜 의회를 재소집했고, 이 의회는 스스로 해산하고 새로운 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이 선거를 통해 구성된 협약 의회는 왕정복고를 결의했고, 1660년 5월 찰스 2세가 망명지에서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이로써 공화정은 막을 내렸지만, 왕정복고 자체가 의회의 결정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의회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이후 모든 정부는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의회에 의존하게 되었다. 크롬웰 시대에 이루어졌던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의회 통합은 1661년 스코틀랜드 의회가 에든버러에서 다시 개회하면서 해체되었다.
찰스 2세는 통치 말기인 1681년,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의회와 극심한 갈등을 겪자 의회를 해산하고 사망할 때까지 4년 동안 의회 없이 통치했다. 이는 내전의 기억이 생생한 상황에서 큰 정치적 도박이었으나, 또 다른 내전을 원치 않는 분위기 속에서 큰 저항 없이 이루어졌다.
1685년 찰스 2세가 사망하고 가톨릭 신자임을 공언한 그의 동생 제임스 2세가 즉위했다. 제임스 2세는 가톨릭 신자의 공직 진출을 제한하는 법률을 폐지하려 하는 등 노골적인 친가톨릭 정책을 추진하여 개신교도들의 강력한 반발을 샀다. 결국 1688년, 의회의 주요 인사들은 제임스 2세의 딸 메리와 그녀의 남편인 네덜란드의 오렌지공 윌리엄에게 군대를 이끌고 와서 왕위를 지켜달라고 요청했다. 윌리엄이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에 상륙하자 제임스 2세의 군대는 와해되었고, 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망명했다.
의회는 제임스 2세의 어린 아들(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 대신 개신교도인 딸 메리에게 왕위를 제안했으나, 메리는 남편 윌리엄과의 공동 통치를 주장했다. 의회는 이를 받아들여 윌리엄과 메리를 공동 군주로 추대했다. 이 사건을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이라고 부른다. 명예혁명의 결과로 의회는 1689년 권리장전을 제정하여 의회의 승인 없는 과세 금지, 의회 소집 보장, 의회 내 발언의 자유 등 의회의 권리를 명문화했다. 이후 1701년에는 왕위 계승법을 제정하여 왕위 계승 원칙을 정하고 가톨릭 신자의 왕위 계승을 금지했다. 이러한 일련의 법 제정을 통해 의회는 왕권에 대한 우위를 확보하고 영국 입헌군주제의 토대를 마련했으며, 국가 통치에서 의회의 중심적 역할이 확립되었다.
5. 연합 의회 (18세기 이후)
잉글랜드 의회는 18세기 이후 두 차례의 중요한 연합 과정을 거치며 그 형태와 명칭이 변화하였다. 1707년 연합 조약을 통해 스코틀랜드 의회와 통합하여 그레이트브리튼 의회가 되었고, 이후 1801년에는 1800년 연합법에 따라 아일랜드 의회와 통합하여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 의회로 이어졌다.
5. 1. 그레이트브리튼 의회 (1707년)
1707년 연합 조약 이후, 잉글랜드 의회와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통과된 법률에 따라 새로운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성립되었다. 이에 따라 두 의회는 해산되고, 이전 잉글랜드 의회의 자리에 새로운 그레이트브리튼 의회가 설립되었다. 이 그레이트브리튼 의회는 1801년 1800년 연합법을 통해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이 형성되면서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 의회로 이어졌다.5. 2. 영국 의회 (1801년)
1707년 연합 조약 이후, 잉글랜드 의회와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통과된 법률에 따라 새로운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성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두 의회는 해산되었고, 이전 잉글랜드 의회가 있던 자리에 새로운 영국 의회가 설립되었다. 이후 1801년, 1800년 연합법을 통해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이 형성되면서 이 의회는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 의회로 이어지게 되었다.참조
[1]
서적
Magna Carta clause 12
[2]
웹사이트
Virtual Shropshire
http://www.virtu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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